즐거운 인생/소중한 추억의 순간

소난지도의 역사

어린왕자! 2007. 11. 7. 17:02

 

소난지도의 역사

 

 

① 소난지도는 당진군의 최북단 석문면에 소속된 난지도리 섬들중의 두번째 큰 섬으로서 면적은162.3㏊(약 50 만평)에 이른다.
본래 도동면의 소대난지도로 난초와 지초가 많아서 난지도라고 연유했다.
하나, 난초와 지초의 자생지도 아니며 풍도와 난지도 사이의 물살이 몹시 세어 배가 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난지도(難知島) 라고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문면에 편입되었다.
② 난지도는 난지도수(難知島戍)를 두고 수군을 주둔시켜 외적을 방비하던 곳으로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을 피해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인조의 원손(소현세자의 장자, 석철)이 3세의 어린나이로 내관(환관), 김인(金仁), 서후행(徐後行)의 품에 안겨 교도, 주문도를 거쳐 피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③ 소난지도 포구의 개항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선 중엽 당시 삼남(三南)의 세미선(稅米船)이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 으로 조운하여 갈때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해로상에 위치하여 정박하고 가던 곳으로 한강이 얼면 다음해 봄 해빙될 때까지 머물렀던 중요한 중간지 역할도 하여 한 때 번창하였었다.

 
 

1907년 을사보호조약에 반기를 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홍일초를 중심으로 수원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한 때는 포군(砲軍)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컸었다.
이들은 다른 의병부대화 함께 유격 전술로 투쟁하다가 점차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쫓겨서 해로로 당진으로 건너와 투쟁하 다가 1906년(병오년) 홍주전투에서 패한 의병들과 합류한 의병 150여명이 소난지도로 본거지를 옮겨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곳은 해상 활동의 중심지라 삼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인 세곡을 서울 경창으로 조운하던 배들의 정박지였으므 로 홍일초 부대는 세곡미를 탈취해 식량 조달이 용이하고 육지와 떨어진 섬으로 방어하기도 유리하여 신변의 안전과 의병들의 재기를 도모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탐지한 일본군은 1908년 음력 2월 12일 솔가지로 위장한 배로 1개 소대병력을 파견하여 소난지도 남쪽 선창 가를 기습하였다. 이에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의병들은 이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먼저 화약이 떨어진 상태에서 다음날 재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육탄전등르로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렇게 우국충정으로 뭉친 애국지사인 의병들은 살신성인 진충보국의 정신으로 일본군에게 굳센 자주의식을 부각시켰었다.
그 후 시신도 제대로 못거두고 이리저리 흩어져 남아있는 시신들을 주민들에 의하여 장안여 격전지앞 밭듬배 바닷가에 웅덩이 를 파고 매장하였다.
그 이후로는 돌보는 이가 없어 의병들의 피맺힌 항쟁사는 세월과 함께 잊혀져 갔었다.
이 의병총의 한 맺힌 역사가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부터 의병총에 관심있는 분들이 선인들의 넋을 안타깝게 여기고 현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흩어진 유골을 모아 1974년 봉분을 조성하였으며, 1982년에는 조그마한 비석을 세우고 묘역 주변을 단장하여 매년 제를 올리고 있으나 의병들의 살신성인 진충보국 정신에 비하면 초라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적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원래 섬이름인 난지도(難知島)가 난지도(蘭芝島)로 바뀐 연유에는 아래와 같은 난지도의 황룡과 청룡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대산반도에 살고 있던 하씨(河氏) 가족이 신천지를 개발하기 위해서 일가족 전체가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서 난지섬의 모래사장에 표류하게 되었다. 큰 뜻을 품었던 하씨는 대실망을 하면서 섬의 산정에 올라가보니 넓은 땅과 기름진 들이 있어 화전을 가꾸기 위해서 불을 놓았는데 산허리 부근에 와서 불길이 이상하게 끊기었으며 그 쪽으로 한 치의 불길이 넘어가지 아니했다. 계속해서 불을 질렀지만 여전히 광풍이 불면서 불길이 끊어졌다.
하씨는 하는 수 없이 「 내일 마른 나무를 많이 놓고 불을 질러야지」하고는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산허리 부근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 네가 이 섬에 살려면 내 말을 잘 들어라, 내일 한낮에 청룡과 황룡의 싸움이 있는데 그들은 서해 바다 바깥쪽에 사는 청룡이 안쪽에 사는 황룡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이다. 황룡은 싸움을 승낙했지만 늙고 기운이 없어 청룡한테 싸움에 질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 섬을 지키는 황룡이 싸움에 이기게 하기 위해서 여기 활과 화살을 놓고 가니 네가 청룡을 쏘아 내일 청룡을 죽여라」라고 말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씨가 잠에서 깨어나니 꿈이기에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머리맡에 활과 화살이 놓여져 있었다. 이튿날 하씨는 일찍 밥을 먹고 도사가 가르쳐준대로 지정된 장소에 가서 바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쪽에서 파도가 산더미처럼 치더니 청룡이 입을 딱 벌리고 나타났다. 황룡도 어느새 나타났는지 엎치락 뒤치락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한참동안 싸우니 황룡이 기진맥진하고 몸이 움직이는 동작이 둔해져 곧 죽게되자 하씨는 얼른 청룡을 향해 힘껏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그 때 공교롭게도 황룡이 물 속에서 불끈 솟는 바람에 하씨의 화살이 황룡에게 맞았다. 황룡은 하늘을 향해 한참 솟구치더니 무서운 신음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섬의 한쪽 끝을 치니 떨어져 나가 그것이 오늘날의 소난지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잘못으로 황룡을 죽게하자 그만 어쩔줄을 모르고 휘휘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하루는 하씨가 제사를 지내는데 비가 촉촉히 내렸다. 하씨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속죄를 하고 있는데 황룡이 죽은 자리에 이상한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풀을 뜯어보니 난초(蘭草)였다. 하씨는 그 후 항상 속죄하는 마음으로 착실히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 장사를 치른지 10여일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비가 개인 후 무덤 근처에서 또 하나의 이상한 풀이 돋아났는데 뜯어보니 지초(芝草)였다.
그 후 양 첫글자를 따서 이 섬을 난지도(蘭芝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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